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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이지 않고 원유 거른다…KAIST, 100년 정유공정 바꿀 `분자 정유` 기술 개발
  • 손종국 기자
  • 등록 2026-06-25 11: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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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온 고분자 분리막으로 원유 정밀 분리…에너지 31.6%·탄소배출 37.6% 감축 효과
  • `오염`으로 여긴 기름 흡착 현상을 분리 원리로 전환…국제학술지 네이처 게재
  • 기존 정유설비에 즉시 적용 가능…폐플라스틱·배터리·의약품 정제까지 활용 기대

국내 연구진이 원유를 350도 이상으로 끓이지 않고 상온에서 분리하는 차세대 분리막 기술을 개발해 100년 넘게 이어진 정유 공정의 패러다임 전환 가능성을 제시했다.

 

선택층 없이 원유를 거르는 상온 분리막 - 스스로 만들어진 나노 통로로 에너지 · 탄소를 줄인다. 상온에서 가압한 원유를 다공성 PAN 분리막에 흘려보내 휘발유 · 나프타 · 등유 등 가벼운 성분만 걸러내는 공정 모식도. 별도의 선택층 코팅 없이도 원유 속 무겁고 끈적한 성분이 기공 벽에 스스로 들러붙어 안정화되며 2nm 이하의 통로를 자발적으로 형성하고, 28일(4주) 연속 운전에도 성능이 유지된다. 공정 모사 결과, 기존 증류 대비 에너지 31.6% · 이산화탄소 37.6%를 절감해 지속 가능한 원유 정제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림설명 및 그림제공 : KAIST 고동연 교수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 연구팀이 값싼 고분자 분리막만으로 상온에서 원유를 정밀하게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번 연구는 과기정통부의 개인기초연구와 선도연구센터(ERC) 사업 지원을 받아 수행됐으며,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현재 전 세계 정유산업은 원유를 350도 이상으로 가열한 뒤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성분을 분리하는 증류 공정에 의존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비되는 에너지는 연간 약 1,100TWh에 달하며, 정유·석유화학 산업은 막대한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대표적인 에너지 다소비 산업으로 꼽힌다. 최근 글로벌 공급 과잉과 원가 경쟁 심화까지 겹치면서 고에너지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원유를 분리막으로 걸러내는 기술을 연구해 왔지만, 초정밀 분리를 위해서는 분리막 표면에 매우 얇은 `선택층`을 별도로 코팅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선택층은 제조비용을 높이고 대면적 생산 과정에서 결함이 발생하기 쉬워 산업화의 걸림돌로 지적돼 왔다.

 

연구팀은 이러한 기존 상식을 뒤집었다. 별도의 선택층을 코팅하지 않은 다공성 고분자(PAN) 분리막에 원유를 그대로 통과시키자 원유 속 무거운 기름 성분이 막 내부 미세 기공에 자연스럽게 흡착하면서 2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 통로를 스스로 형성하는 현상을 발견했다. 원유가 분리막과 상호작용하며 최적의 분리 구조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새로운 원리를 규명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벼운 나프타와 휘발유, 등유 성분은 빠르게 통과하고 무거운 성분은 효과적으로 걸러졌다. 일반적으로 분리막 성능을 떨어뜨리는 `오염(파울링)`으로 여겨졌던 기름 흡착 현상을 오히려 정밀 분리의 핵심 원리로 활용한 것이 이번 연구의 가장 큰 특징이다. 연구팀은 기존 최고 수준의 원유 분리막보다 23배 빠른 분리 속도를 기록했으며, 28일 연속 운전에도 성능 저하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상온 PAN 분리막의 원유 정제 성능 - 경질 유분 농축과 28일 장기 운전 안정성. 짙은 색의 원유 두 종(아라비안 엑스트라 라이트(AXL), 아라비안 라이트(AL))이 PAN 분리막을 거치면 맑은 경질 유분으로 바뀐다. 끓는점 분포 분석 결과, 교차흐름(cross-flow) 방식에서 투과액의 200℃ 이하 경질 성분이 원유 원액 대비 크게 증가했고(AXL: 34.8→61.5%, AL: 25.1→52.0%), C20 이상의 무거운 성분은 효과적으로 걸러졌다. 또한 상용 분리막과 달리 PAN 분리막은 28일 연속 운전에도 투과 성능을 안정적으로 유지해 우수한 내구성을 입증했다. 그림설명 및 그림제공: KAIST 고동연 교수

산업적 활용 가능성도 높다. 연구진은 기존 정유공장의 배관에 필터 모듈을 추가하는 방식만으로 기술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원유를 먼저 분리막으로 처리한 뒤 남은 성분만 증류하면 기존 공정 대비 에너지 소비는 31.6%,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6%, 운영비는 36%까지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국내 정유·석유화학 산업 전반에 적용할 경우 연간 약 1천만 톤의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승용차 약 400만 대가 1년 동안 배출하는 탄소량에 해당하는 규모다. 또한 원유 정제뿐 아니라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정제, 배터리 용매 회수, 의약품 정제 등 다양한 정밀 화학 공정에도 활용할 수 있어 해외 기술에 의존하던 분리 공정의 국산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고동연 KAIST 교수는 "이번 연구는 분리막이 혼합물과 만나 스스로 최적의 분리 통로를 형성한다는 새로운 과학적 원리를 규명한 성과"라며 "실제 원유를 공급한 HD현대오일뱅크와 긴밀히 협력해 실험실 수준을 넘어 산업 현장 적용 가능성까지 검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공동 교신저자인 이재우 KAIST 교수는 "향후 대면적 모듈화와 장기 운전 기술을 완성해 100년간 증류 공정이 지배해 온 정유산업을 분리막 기반 공정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제1저자인 최지훈·서혁준 박사는 "자발적 기공 수축 현상을 정밀하게 제어해 정유 공정 전반을 막 분리 기술로 대체하는 것이 목표"라며 "폐플라스틱 재활용과 바이오연료 정제 등으로 기술을 확장해 탄소중립 실현에도 기여하겠다"고 말했다.

 

김성수 과기정통부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이번 성과는 정유 공정의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을 동시에 줄여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의미 있는 연구"라며 "앞으로도 기초연구가 국민이 체감하는 성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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